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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by 래레 2023. 5. 21.

절망이 깃들어 보이지만 어쨌든 축제라는 흥겹고 즐거운 결말로 끝날 것 같은 반어법 끝판왕의 제목,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를 전자책에서 셀렉트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읽기를 시작하니, 이제 갓 인턴을 시작하여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22살 술라이커의 백혈병 투병 에세이 였고, 

투병하는 사람의 모든 마음과 감정, 그 주변 사람들의 상황까지도 알 수 있는 놀랍도록 솔직하고 자세한 이야기였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 한다. 

 


집행유예를 받은 기분이었다. 아무도 내게 뭔가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기를 쓰고 미술 공예 수업도 등록했다.
병원 내 자원봉사자에게 뜨개질을 배워 윌에게 줄 목도리도 뜨기 시작했다.
-80p, 버블걸

 


투병의 초기상태와 감정들_

 

" 안에서 일종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젊고 당돌하고 쾌활하며 병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한 '모범생' 환자, 질투에 사로잡혀 자주 짜증 내고 침실에 누워 하루 열여섯 시간을 자는 지금의 나."

"하지만 이제까지 느낀 적 없는 분노가, 아직은 숨겨져 있지만 언제든 내 주변 모두를 파괴해 버릴 것만 같은 분노가 내 안에 쌓여가고 있었다. 나의 적은 윌이나 사회복지사, 바깥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걸린 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나고 또 하나의 꿈이 미뤄질 때마다 그들을 나의 진짜 적과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느껴졌다."
-101p, 나의 적들

"고통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만든다. 고통을 겪다보면 이 세상에 오직 나와 내 분노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멍든 팔다리에 깔려 구겨지는 진찰대의 종이 덮개나, 의사가 새로운 결과지를 들고 진료실로 들어올 때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쿵쿵대는 심장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병 때문에 인생이 중단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어느 정도 비슷한 파탄에 직면해 있었다. 병실에 나 혼자 있지 않다는 사실부터 내가 그나마 운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105p, 임상실험 블루스

 


100일 프로젝트의 시작 : 변화의 시작_

 

"사람들은 비극적인 소식을 들으면 '말문이 막힌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내 말문은 전혀 막히지 않았다. 다음날, 그리고 그다음날에도 언어가 물줄기처럼 터져 나왔다. 처음엔 다소 느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빠르고 세차게 넘쳐흘렀다. 내 머리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생각들이 내가 적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쏟아졌다. 내가 쓰기 시작한 글은 이전에 쓰던 글과는 전혀 달랐다. 미래에 관한 내용은 없었고 문장 하나하나가 현재에 근거한 것이었다. 나는 항상 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유형의 서술자라고 생각해 왔지만, 글을 쓸수록 점점 더 1인칭 시점에 이끌리는 것을 느꼈다. 투병 생활이 내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110p

 

"몸이 너무 피곤해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움직일 수 없다면, 우선순위를 정한 뒤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보람 있게 쓰면 된다. -112p

 

"100일 프로젝트가 이후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때의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내가 내 안의 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113p, 100일 프로젝트

 

나는 언어를 발견하고 싶었다. 내 뼈에 생긴 이상한 사건을, 몇 달이고 침대에 묶여 홀로 생각을 곱씹어야 했던 시간을, 죽음이 내게 안겨준 그 모든 굴욕과 부질없는 희망을, 차례로 죽어가는 동료 환자들을 목격하며 내 안의 무언가도 죽어갔던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찾고 싶었다. 사실 나도 내가 뭘 하려는 건지 잘 몰랐고, 뭐든 간에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잃을 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은 나를 대담하게만들었다. 

-121p, 골수이식 탱고

 

입원 전 날 밤에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집 안을 돌아다녔다. 유년기부터 지낸 침실을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보며 분홍색 벽에, 책꽂이에, 어린 시절 붙인 포스터들에 작별을 고했다. 더블베이스의 목 부분 나뭇결을 쓰다듬으며 잘 있으라고 인사했다. 오랜 시간 동안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셀 수 없이 많은 식사를 했던 식탁에, 꽁꽁 얼어붙은 어머니의 정원 화단에도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과연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죽음에 직면한 사람에게 애도란 현재형으로,
마지막 숨을 내쉬기 한참 전부터 성큼 다가오는 내밀한 작별의 순간들로 시작된다.
-124p, 망원경 양쪽 끝에서

 


남자친구 윌과 간병인과 환자라는 관계_

 

윌을 계속 기다리는 건 더 큰 슬픔과 고통, 분노의 가능성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더는 그런 감정을 견딜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내가 벼랑 끝에 이르렀다는 걸, 벼랑이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어느새 위태로운 지점까지 와버렸다는 걸 뚜렷이 느꼈다. 

그렇게 깨닫고 보니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설 자리를 찾고 싶다면,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관계를 되살리려 드는 건 그만둬야 했다. 나는 나 자신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 

-191p, 끝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친구
멀리사가 가고 싶어했던 델리로_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암에 걸리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마침내 깨닫기 시작한다. '충분히 회복'된 다음에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면 나는 영원히 기다려야만 하리라. 씁쓸하지만 꼭 필요한 깨달음이다. 이 병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할 것이며, 나는 병과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210p, 통과 의례

 

온전한 몸과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회복은 우리를 병에 걸리기 전 상태로 복원시켜 주는 편안한 자기 관리 같은 것이 아니다. 회복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과 달리 결코 예전의 나를 되찾는 일도 아니다. 회복은 익숙한 내 모습을 영원히 버리고 새로 태어난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발견이다. 

-225p, 재진입

 


미국 횡단여행의 시작_

 

거대한 장관을 마주하면 우리는 경탄하게 된다.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체 왜 그때까지 주변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는지, 삶을 지루하게 여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첫 번째 화학요법 치료를 받으러 마운트시나이 병원으로 걸어가는 날, 앞으로 몇 주는 바깥에 나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니 하늘 색깔부터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결까지 모든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날의 새로운 경이감이 이후로도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다시는 뭐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시야는 병동 안으로, 침대 위로 좁혀져만 갔다. 병실에 갇혀 바깥세상과 차단되면서 나는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고, 마침내 그곳에서 나온 뒤에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쫓기느라 더더욱 내 안으로 침잠해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 폭포 아래에 와서야 나는 다시금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법을 깨닫는다. -247p

 

어쩌다 그리되었을까? 그렇게 되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내게 일어난 최악의 사건은 지난 몇 년 사이 내 존재와 정체성, 심지어 경력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나의 어떤 부분과도 연결되지 않은 지점이 없다. 내 시야는 좁아졌고 자연스레 관심사도 줄어들었다. 치료를 마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암은 여전히 내 삶을 지배하며 다른 가능성을 짓누르고 있다. -253p

 

하지만 그는 나와 달리 상황에 굴하지 않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왔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 위에 삶을 구축하고 필요하다면 볓 번이든 다시 고쳐 지었다.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고 지극히 만족스러운 경력을 쌓기에 이르렀다.

 

천천히, 충분한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애쓰다 보면 다시 삶에 몰입하게 될 거예요.
정말이지 삶이란 지극히 행복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당신 곁에 끝까지 남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254p, 긴 여정

 

나는 나를 두고 윌이 혼자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화를 냈다. 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나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 둘의 상황이 얼마나 다른지 뚜렷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와 내 또래들, 혹은 나와 이 세상 모든 건강한 사람들의 상황이 다른 것처럼.

 

왜 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데 다른 사람들은 무탈한지, 어떤 이들은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데 다른 이들은 행복한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환자가 되었다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고 때로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이런 상황 자체에 분노하는 게 부질없고 심지어 해롭기만 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나의 부자유한 처지를 남들이 누리는 자유와 자꾸 비교하게 됐다. 나 역시 그들처럼 자유롭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럴 수 없어서 그들을 미워했다. -268p

 

그렇게 한 시간을 달리자 윌에게 남아 있던 분노가 완전히 사라진다. 분노에 가려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그 자리에 스며든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다. 윌은 끝까지 내 곁에 머무르진 않았지만, 중요했던 시기에 내 곁을 지켜주었다. 윌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내가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는지 말해주고 싶다. 

-273p, 고통의 가치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사실 세 번 여행하는 셈이다. 여행을 준비하고 기대하고 짐을 싸고 상상하는 것이 첫 번째 여행이고, 실제로 돌아다니는 것이 두 번째 여행이다. 마지막 세 번째 여행은 기억 속에서 이루어진다. 중요한 건 세 여행이 최대한 분리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있는 상황에 충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290p, 브룩처럼 해보기

 

신은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시련만을
주는 법이니까.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지. 
-304p

 

열어놓은 차문 밖에서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우리는 무릎에 각자의 그릇을 올려놓고 구수한 스튜에 빵 조각을 찍어먹으며 얼마 만에 한 번씩 머리를 감는 게 적당한지부터 개똥철학까지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친구들은 삶이 덜 분주해야 하며 더 많은 여가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오늘 우리가 보낸 하루처럼.

-309p, 집으로